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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2)

Sep 27, 2017 05:35 AM EDT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우리의 육체적 행위에 의해 행해진 외적 행위들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상황들,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유인하거나 촉발시키는 모든 상황들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충동들. 또한 이것은 "행함"이라는 단일한 용어가 사람이 완전히 굴복하여 죄로 떨어지는 경우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으로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특히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모든 죄의 뿌리이자 근원, 즉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신앙을 바라본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영과 소원을 주듯이 불신앙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것은 육을 높이며 창세기 3장[:6]에서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일어났던 것처럼 명백하게 잘못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6장[:8f]에서 그리스도는 영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선행 또는 악행이 행해지기 전에, 그것들이 선한 열매 또는 악한 열매로 드러나기 전에 신앙 또는 불신앙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모든 죄의 뿌리, 수액(樹液), 주요한 동력이 있다. 이것은 성경이 뱀의 머리, 옛 용의 머리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는 아담에게 약속한 대로 그 머리를 부수었음에 틀림없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은혜(grace)와 은사(gift)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호의 등을 말하고 있는 5장[:15f]에서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14-23]과 갈라디아서 5장[:17f]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3장[:15]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은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많은 은사들처럼 파편적으로 나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며 은사들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여전히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7장[:9f]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 (여전히 불 완전한) 은사들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고발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8장을 당신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의 육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와 선의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들을 보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죄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는 믿음에 따라 우리를 다루신다.

믿음(faith)은 꿈꾸는 그 무엇,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용어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믿음에 도덕적인 진보나 선행들이 수반되지 않음을 보면서 여전히 믿음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그들은 믿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가 올바르게 되고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들"을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추리력으로 그들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한 생각을 날조하여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른다 .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시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 요한복음 1장[: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활동적이 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믿음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며 선행을 찾아다니지만 믿음이 무엇이며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지껄인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흔들림 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그릇된 인식들과 자기들이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 영리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들을 주의하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당신 안에 믿음을 창조해주시도록 간구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할지라도 또는 당신의 노력과 능력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righteousness)는 바로 우리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믿음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 하도록 사람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죄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의 계명들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존귀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따라 기꺼이 사람들을 섬기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 . 이런 유의 의는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나 우리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통상적인 자연과 과정 속에서 생겨날 수 없다.

아무도 스스로에게 믿음을 줄 수 없으며 불신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 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은 자신의 가장 작은 죄악들조차도 없이할 수 있는가? 믿음이 없이 행해진 것이나 불신앙의 결과로서 행해진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졌다고 하더라도 거짓된 것, 자기 기만, 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서 14장[:23].

(flesh)과 (spirit)은, 육은 오로지 도덕적 불결과 관련이 있고 영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 바울과 요한복음 3[:6f.]에서 그리스도에 따르면 육은 육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 즉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포함하여 몸과 영혼, 자기 자신 전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육에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이 갈라디아서 5장[:19f.]이 육체의 일로 묘사하면서 육체의 외식과 가증스러운 행위들로 부르고 있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영의 고상한 것들에 관하여 유쾌하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게다가 로마서 8장[:3]은 율법이 육에 의해 약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불결만이 아니라 모든 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격상 좀 더 영적인 일종의 악함인 믿음의 결여에 대하여 언급한다.

반면에 영적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베드로가 배를 띄워 고기를 잡고 있었을 때처럼 가장 외적인 행위들에 몰두해 있는 사람에게 흔히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육"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몸과 현세의 삶에 봉사하며 살아가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영"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영과 내세의 삶에 봉사하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당신이 이 용어들에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바울의 로마서나 성경의 어떤 책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롬이든지 아우구스티누스든지 암브로시우스든지 오리겐이든지 아무튼 그 누구든지 이 용어들을 다른 식으로 사용하는 모든 교사들을 경계하라.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인물들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서신 자체에로 눈을 돌려보자.